![]()
![]()
암흑. 태아의 심장 박동 소리. 타이틀 천천히 떠오른다.
生
도시의 소음이 심장의 고동을 죽인다.
S #1 실외 횡단보도 앞 이른 저녁
신호등의 파란 불이 깜박거린다. 혜정(30대 초반), 길을 건너려고 급히 뛰지만 신호등은 빨간 불로 바뀌고 자동차가 혜정 앞을 막는다. 혜정,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뀌기를 기다리며 마음이 바쁜지 신호등과 오가는 차들을 번갈아 쳐다본다. 신호등이 드디어 파란 불로 바뀌었는데 횡단보도를 차들이 점령하고 있다. 혜정은 차들 사이로 바삐 뛰어간다.
S #2 실내 미술학원 계단 이른 저녁
혜정이 좁고 긴 계단을 숨가쁘게 올라간다.
S #3 실내 미술학원 이른 저녁
텅 빈 유치원에 지민(5살) 혼자 그림을 그리고 있다.
혜정: 지민아!
지민: (혜정에게 뛰어와 안기며) 엄마!
혜정:
지민아, 엄마가 미안해.
지민: 괜찮아.
미술학원 선생님, 옆 방에서 나온다.
미술학원 선생님: 이제 오셨어요?
혜정,
고개를 돌려 선생님을 본다. 미술학원 선생님이 자기보다 훨씬 어린데도 혜정은 고개 숙여 인사한다.
혜정:
선생님,안녕하세요.
선생님, 지민이가 가지고 놀던 크레파스를 제 상자에 넣는다.
혜정: 정말 죄송합니다.(몸을 일으키며) 애아버지가
오늘 데리러 오기로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지민이 어머님, 이렇게 늦으시면 안 되죠. 저도 제 생활이
있는 사람인데, 지민이 하나 때문에 제가 가지를 못하잖아요.
혜정: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럼 안녕히 계세요.
혜정. 지민이
옷을 입히지도 못하고 총총히 미술학원을 나선다.
S #4 실외 집으로 가는 골목 이른 저녁
혜정, 지민이를 데리고 집으로 향한다. 집으로 가는 길은 그리 넓지 않은데 빽빽하게 주차되어진 차들로 인해 더 좁게 느껴진다. 문방구 앞
전자오락기 앞에는 사내아이들 몇 명이 앉아서 버튼을 손이 안 보이게 눌러대고 있다.
혜정: 지민아, 유치원에서 무슨 노래
배웠어?
지민: 곰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어. 아빠곰, 엄마곰, 애기곰.
아빠곰은 뚱뚱해. 엄마곰은 날씬해. 애기곰은 너무너무
귀여워.
으쓱으쓱 잘 한다. 으쓱으쓱 잘 한다.
혜정: 야! 우리 지민이 노래 잘하네.
S #5 실외 집(계단) 이른 저녁
혜정, 지민이와 함께 골목을 돌아 좁은 문을 들어선다. 지민이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지민: 옛날 옛날에 개미 한 마리 뚝
떨어졌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개미야, 개미야, 얼마나 아프니?
혜정은 2층에 세 들어 산다. 2층까지 올라가는 계단은 밖에 따로 나
있는데 오늘 같은 날은 그 계단이 참 길게 느껴진다. 혜정과 지민, 계단을 오르려고 하는데 1층 문이 열리면서 주인 아줌마(50대) 가
나온다.
집주인: 지민이 엄마로구나!
지민: 안녕하세요..
혜정: 안녕하세요.
혜정, 지민을 데리고 계단을
올라간다.
집주인: 지민이 엄마.
혜정, 뒤돌아본다.
혜정: 네.
집주인: 이번 달에는 집세를 좀 제대로 줄 수
있겠수?
혜정: 네.
집주인: 우리 애한테 돈을 좀 부쳐야 되거든....
혜정: 아, 네.
S #6 실내 혜정 집 이른 저녁
혜정과 지민 현관을 들어온다.
지민: (신발을벗으며) 지퍼 다 내가 했어!
혜정: 어, 잘했어. (지민의 신발을 마저 벗기며)
으쌰.
집에는 아무도 없다. 방 안에는 이부자리와 벗어놓은 옷이 아무렇게나 놓여있다. 텔레비젼 앞에 담배가 수북히 쌓인 재떨이와 빈 맥주
캔이 있다. 맥주 캔 옆에는 고추장이 담긴 종지와 마른 멸치, 오징어가 있다. 혜정, 이불을 개키고 옷을 접어 옷장에 넣는다. 지민이는
텔레비젼을 켜서 본다. 텔레비젼 옆에는 지민이의 귀여운 모습의 독사진들이 진열되어 있다. 혜정은 음식 나부랭이를 부엌으로 가져오고 재떨이는
쓰레기통에 비운다. 설거지를 하고 있는 혜정. 문소리가 들리고 태준(30대 후반), 술에 취한 모습으로 들어온다.
태준, 혜정과 눈이
마주친다.
태준: (신발을 벗고 들어오며) 지민아, 지민아.
혜정: 식사는요?
태준: 음.. 먹었어.
태준,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는다. 닫힌 문을 바라보는 혜정.
S #7 실내 혜정 집 방 밤
태준,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TV의 스포츠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다. 혜정, 문을 열고 빨래감을 가지고 들어온다. 혜정, 빨래감을
내려놓으면서 작은 신음 소리를 낸다. 무릎이 아프다. 긴 하루였다. 혜정, TV에 시선을 잠깐 주지만 그 내용에는 관심이 없다. 빨리 빨래를 다
개고 쉬고 싶다.
혜정: (빨래를 개키며) 오늘 누구 만났어요?
태준: 바람 좀 쐬고 왔어.(담배를 피우며)
혜정: 낮에 드시고
또요?
태준: 사람 만나면 마실 수도 있지, 그걸 가지고....
혜정: 몸도 안 받는데 많이 드시니까 그렇죠.
근데, 아까
지민이 미술학원에서 데려오는 거 잊어버렸어요?
태준: (몸을 일으키며) 밖에 있어서 깜빡 했어.
혜정: (한숨) 미술학원 선생님한테
너무 너무 죄송했어요.
우리 지민이 혼자만 남아있는데.... (긴 한숨을 쉰다.)
태준: 학교도 안 들어간 애를 무슨 학원까지
보내고 그래.
혜정: 당신은, 요즘 애들은 다 해요. 우리 지민이 피아노 학원도 보내야 되는데....
태준, 담배를 챙기고 잠바를
들고는 나가려고 한다.
혜정: 여보, 여보, 추운데 어디 가요?
태준, 대꾸하지 않고 나간다.
혜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밖의 문이 닫힌다.
S #8 실내 미장원 낮
손님의 머리를 드라이하고 있는 혜정. 미장원 옆에 붙어있는 피아노학원에서 서투른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혜정의 손놀림은 익숙하고 빠르지만
혜정의 얼굴은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는 것 같이 보인다. 뒤쪽에서는 애리가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옷에 묻어 꾸덕꾸덕 굳은 하얀 파마 약을 물 묻힌
수건으로 닦아내고 있다. 애리, 옷을 대충 닦은 후 롯트를 색깔별로 분리해 고무줄로 묶는다.
손님은 피곤한 듯 눈을 꼭 감고 있다. 혜정,
앞머리를 드라이한다. 드라이를 끝내는 것이 얼마 남지 않았다.
손님: 아우, 머리 타요.
혜정: 예, 죄송합니다.
혜정,
앞머리를 마무리한다. 혜정, 거울 속의 손님의 모습을 확인한다.
혜정: 스프레이 좀 뿌려드릴께요.
손님: (가운을 벗으며) 스프레이
안 뿌리셔도 되요.
혜정, 빗을 챙기며,장부에 기입을 한다. 애리, 옷장에서 손님의 옷을 꺼내고,가방을 건넨다. 손님, 왠지 어딘가
불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백에서 지갑을 꺼낸다.
손님: 여기요.(손님,혜정에게 돈을 준다.)
혜정: 예, 참 손님 저번에
드라이 한 것 돈 안주시고 가셨는데....
손님: 제가 언제 그랬어요. 빨리 거스름돈이나 주세요.
혜정, 손님에게 거스름돈을
준다.
손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간다.
혜정: 안녕히 가세요.
애리: 안녕히 가세요.
애리, 가운을 정리한다. 혜정,
돈을 서랍에 넣으며, 겉옷을 가지고 나온다.
애리: 언니, 배고파 죽겠다. 빨리 밥먹자!
혜정: 잠깐 나갔다 올께.
애리: 밥
안 먹어? 어?
혜정: 머리가 아파서.
애리: (나가는 혜정을 보며) 머리 아픈 거랑 밥 먹는 거랑 뭔 상관이야?
S #9 실내 약국 낮
혜정, 약국에 들어선다. 약국의 텔레비전에서는 홈쇼핑이 방영되고 있다. 약사(30대 중반)는 난로 옆에 앉아 있다.
약사: 왜,
지민이 아빠 아직 감기 안 떨어졌어?
혜정: 아니요, 거의 나았어요.
약사: 에이, 지민이 엄마가 감기 옮았구나.
혜정:
아니요....
약사: 그러게, 내가 비타민 C하고 철분 좀 먹으라고 했잖아. 여자 나이 서른이면 내리막길이 야.
혜정: 저..
집에서 임신 혼자 확인하는 것 좀 주세요.
약사: 지민이 동생 생기는구나. 아들이면 좋겠다.
혜정: 형편이 되야 낳죠.
약사:
하긴, 요즘 지민이 아빠 일자리 좀 보러 다녀?
혜정: 그게 어디 쉬어요?
약사: 아참∼ 며칠 전에 내 친구한테 들은 얘긴데,
백화점에서 경품주는거, 왜 냄비세트 같은거 주는거 있잖아 그 대신 직장을 구해주는 게 있다고 그러더라고, 거기 한번 가 보라고
그러지.
(혜정의 표정을 보고) 아이 뭐! 갑자기 생각나서 한 얘기야.
(약을 건네주며) 결혼한 여자가 뭐 그거 한번 안 해 본 여자
있어?
S #10 실내 지민이 방 밤
지민이의 방은 넓지 않지만 꾸미는데 많은 정성을 들였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커텐은 따뜻한 느낌을 주는 오렌지색이고 침대 머리맡에는 크고
작은 인형들이 놓여져있다. 한쪽에 있는 키작은 책장에는 동화책이 꽤 많이 꽂혀있다. 지민이는 잠옷차림이고 혜정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다.
지민이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삐뚤삐뚤하게 원을 그리고는 눈과 코를 그려넣는다.
혜정: 이게 뭐야?
지민: 사과.
혜정: 사과에
눈도 있고 코도 있네.
지민, 웃는다.
혜정: 우리 지민이, 그림도 잘 그리네. (그림 도구를 치우며) 지민아 이제
자야지.
(지민이를 눕히며) 으쌰 올치!
지민,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는 눈을 꼭 감는다.
혜정: 지민아.
지민, 눈을
뜨고 엄마를 쳐다본다.
혜정: 엄마가 지민이 정말 사랑해.
지민: 나도.
혜정, 지민의 이마에 뽀뽀한다.
혜정: 코
자∼
혜정, 일어나서 램프 옆으로 간다. 불 끄기 전, 지민이의 얼굴을 본다.
혜정, 지민이 방의 불을 끈다.
암전.
S #11 실외 산부인과 앞 길 오후
혜정이 어떤 건물에서 나온다. 혜정의 발걸음은 지쳐 보이고 힘이 없다. 혜정은 땅을 보고 걷는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옷깃을 추위에
움추려 자기가 가야 할 곳을 바삐 가고 있다. 그 때 혜정, 중년의 어떤 남자와 부딪힌다.
혜정은 미안하다고 말할 생각으로 그 남자를
쳐다본다.
남자: 아이 뭐야! 바빠죽겠는데... 씨!
혜정, 얼이 빠진 듯 그 자리에 서 있는다. 혜정의 모습은 너무나
작다.
S #12 실내 혜정 방 밤
혜정, 벽쪽으로 돌아누워있다. 문이 열리고 태준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태준, 방으로 들어와 혜정 옆에 눕고 혜정의 가슴팍에 손을
집어넣는다. 혜정, 태준의 손을 뿌리친다.
혜정: 그냥 자요.
태준, 혜정에게서 몸을 떼고 바로 눕는다.
S #13 실내 화장실 오후
혜정, 변기 위에 앉아있다. 혜정의 얼굴은 혈색이 없고 창백하다. 옆구리에 통증을 느끼는 듯 신음소리. 한 손으로 그 부위를 만지며 얼굴을 찡그린다. 혜정, 일어나 변기의 물 내리는 손잡이를 내린다. 씻어 내려가는 물에 피가 섞여있다.
S #14 실내 방 오후
혜정, 방으로 들어와 자리에 눕는다. 불편한 듯 이리저리 뒤척거린다. 혜정이 베고 있는 베개가 혜정의 눈물로 적셔진다. 현관문
노크소리.
혜정: 예..예, 누구세요?
아줌마: (소리만) 어, 옆집 아줌마야.
혜정: 네.
혜정,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나간다.
S #15 실내 문 앞 오후
혜정, 문을 연다. 지민이와 옆집 아줌마
지민, 엄마에게 매달린다.
지민: 엄마!
혜정: 고마워요,
아줌마.
아줌마: 그걸 가지고 뭘 그래∼ 푹 쉬어.
아줌마, 혜정을 방에 가서 쉬라고 밀고는 총총히 나간다.
S #16 실내 방 밤
혜정과 지민이가 식사를 하고 있다. 지민, 밥 먹다 말고 텔레비젼 앞으로 간다. 텔레비젼에서는 만화가(열려라 꿈동산) 방영되고 있다.
혜정: 지민아, 마저 먹어야지.
혜정, 숟가락에 지민이 밥공기에 남아있던 밥을 담아 지민이 입에 넣어준다.
지민이는 텔레비전
앞에 가까이 앉아서 만화를 본다. 혜정, 밥상 앞에 다시 앉는다. 혜정의 밥공기에는 밥이 1/3 정도 남아있다. 혜정, 숟가락을 들었다 놓는다.
밥상을 들고 나간다.
S #17 실내 문 앞/부엌 밤
혜정, 밥상을 부엌으로 들고 가 그 밥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식탁 위의 수저와 그릇들을 싱크대로 가져간다. 설거지를 하는 혜정의 뒷모습이 우리에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