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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의도
'낙태'에 대한 주제는 나에게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제일 처음 낙태란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미국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미국 학교에서는 토론(debate)을 많이 시키는 것이 한국에 있을 때와는 다른 점이었는데 토론의 주제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낙태 문제였다. 한국에 있을 때는 해도 끝이 없고 결론이 나지 않는 토론의 제목으로 '과외'를 떠올렸었는데 미국에서는 과외는 이슈조차 되지 않고 낙태가 가장 뜨거운 토론의 제목이 되는 것이 바로 문화의 차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면 한국에서는 과연 낙태에 관한 문제가 미국보다 더 적은 것일까?'라는 궁금증을 품게 되었다. 1996년 낙태반대운동연합에서 주최한 한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낙태에 관한 실상과 현실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알게 된 기회가 되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한 사람의 생환에 그렇게도 감격해하며 생명의 고귀함 운운하는 우리들이 같은 나라에서 하루에 4,300여명이 죽어간다는 사실에 대해 관심조차 갖지 않는 이중성과 모순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수치로 보면 우리 나라는 전세계 1, 2위를 다투는 낙태 천국이라고 한다. 한 해에 태어나는 신생아는 100만명 정도인데 비해 엄마의 자궁 속에서 죽임을 당하는 태아들은 그 두 배인 200만명 정도에 이르른다고 한다. 우리 나라는 특히 뿌리깊은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해 태아의 성을 검사해 딸이면 지우는 경우가 많아 둘째, 셋째의 남녀 비는 자연적인 상태에서의 그것보다 훨씬 높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에도 남자 애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남녀공학이었는데도 '홀아비 반'이라고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특수학급이 생겼었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를 만들고 싶은 이유는 낙태에 관해서 말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낙태반대를 홍보하기 위해서? 낙태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해서? 는 더더욱 절대로! 아니다. 나는 더 큰 의미로서의 '죄'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었다. 인간의 양심은 한계가 있고 상황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지만 절대자의 변하지 않는 법 앞에 섰을 때 한 사람의 행동이 심판 받고, 다른 사람의 유사한 행동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이 질문을 인물들의 삶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보는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해 더 가깝게 생각하고 느끼도록 하고 싶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의 화법은 최대한 미사여구를 자제하고자 의도한다. 내가 어떤 시점을 만들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있는 그대로라고 관객들이 느끼도록 다큐멘터리같은 접근방식을 취하고자 한다. 그런 생각의 선상에서 카메라 움직임, 조명 디자인, 분장, 의상을 포함한 프로덕션 디자인의 세부적인 부분들이 결정될 것이다.
연출의도
우리는 얼마 전 보험금을 타기 위하여 아버지가 아들의 손가락을 자른 사건에 대하여 들었다. 언론은 분노, 경악이라는 표현을 아끼지 않으며 이 사건을 크게 보도했고 사람들은 충격과 부끄러움으로 휩싸였다. 그 다음 날 신문에서는 손가락이 잘린 소년을 돕기 위하여 온정의 손길이 잇따르고 있고 경남도지사와 마산시장도 그 소년을 방문해 성금을 전달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生>은 원래 3년 전쯤 구상했던 이야기지만 그 동안 여유도 없었고 영화화에 대한 확신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묻어두었던 시나리오였다. <스케이트> 개봉을 전후해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이 이야기를 들추어내게 되고 다시 고쳐 썼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이 영화를 꼭 찍어야겠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생 손가락 절단사건'에 대한 뉴스를 접한 것은 김포공항에서였다. 6년이 넘게 살았던 뉴욕에 귀국한지 2년만에 처음으로 방문하기 위해 비행기에 오르기 바로 직전이었다. 나는 이 사건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며 눈물을 흘렸다. 나는 손가락이 잘려진 아이에 대하여 들으며 태어날 수 없었던 아이들을 생각했다. 잘려진 손가락을 보며 팔과 다리와 머리가 갈기갈기 찢긴 태아의 모습이 내게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손가락이 잘린 소년에 대하여 진실로 마음 아파하는 나를 보며 생명을 빼앗긴 아이들을 위해서도 동일한 마음을 가져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는 것만을 좇고, 보이는 것만을 숭배하는 이 세상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사실은 가장 소중한, 지금 만질 수는 없지만 살아있는 생명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이 짧은 영화를 통하여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어쩌면 세상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있는 사람과 볼 수 없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